야설

[야설 ] 먼동(17)


먼동(17)


모든 일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대기가 그의 누나인 준혜와 같이 통사정을 해보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그의 부모들은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하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그것은 단시일에 의한 것이 아니고 상당히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온 것이었다. 다만 둘 사이에만 오간 것이어서 대기와 준혜,상미가 잘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미 아버지가 운영하던 회사마져도 처분하고 재산의 분리도 마친 상태였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지? 대기는 생각한다. 하나 그것은 이미 늦은 것이었다.
부모가 이혼을하고 모든 것이 분리가 되는 이 상황, 한 가족이 둘 혹은 그 이상으로 흩어져 버려야 하는 이 상황이 이미 수습할 수 없게 되기까지 그 구성원의 하나로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하는 자괴감도 이젠 너무 늦어버린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
성격 차이로 인하여 이젠 더 이상 같이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로 그들은 자녀들에게 이혼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었다.

성격 차이
성 격차
둘 중의 하나겠지만, 그것은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묶어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임에 틀림없겠으나, 그들이 같이 살면서 만든 가정이라는 테두리와 거기에 속한 피붙이들에게는너무도 큰 상처덩어리를 남기는 것임에도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사들에겐 더할 수 없이 크나큰 이유이고 세상의 어떤 장애보다 큰 것일지 몰라도 그들의 자녀들에게는 아니었다.둘이 남녀의 관계라면 자녀들과 부모는 혈연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네들은 남과여의 관계로 만났고 남과여의 관계로 살아가다가 그것이 어느날부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보다 새롭고 좋은 것을 위해 헤어진다는 것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때문에 그것을 이해하여 달라고 말한다하여도, 최소한 자녀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은 아니었다. 설령 세상의 인구 대부분이 이해하고 적극 지지한다하여도 여기 셋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꼭 그래야만 되겠느냐는 대기의 질문에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다는 아버지 조금만의 표정에는 체념이 짙게 깔려 있었고, 이젠 엎질러진 물이라는 어머니 허영심의 표정엔 새로운 물그릇을 준비하는 의지가 엿보였다.

허영심은 아파트로 분가하여 나갔다.

한 여자가 아파트를 사서 거기에 들어가 산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정에 미치는 영향이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사십을 조금 넘긴 한 여자가 아파트에서 홀로 산다는 것은 혹자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나 지나쳐도 좋을 얘기거리지만, 그 여자의 가족에 해당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고 암담한 것일 수도있는 것이다.

대기가 그의 이모인 허영순에게 아파트를 내어주고 그녀가 그 아파트에 살게되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와 자신의 어머니인 허영심이 아파트에 입주하여 살게된 현실이 외관상 그리 큰차이가 없슴에도 정작 대기의 마음의 작용은 엄청난 차이를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와 이모의 차이만큼 큰 것이었다.

그리고 보름 후에 대기의 아버지가 떠났다.

한 일 년 쯤 이라는 말과 함께 요양차 깊은 산 속에 있는 절에 들어갔다.

네가 이제 이 집의 가장이다
대기에게 마치 선전포고라도 하듯 말하고는 떠나갔다.대기에게 서류 봉투를 하나 던지듯 떠밀고 떠나버린 아버지를 대기는 잡을 수 없었다.
대기가 보기에도 아버지 조금만에게는 얼마간의 휴식이 필요하리라 느껴졌기 때문이다.그만큼 그는 지쳐있었다.그에게서 삶의 의욕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지쳐있었다.

봉투 안에는 집문서를 비롯하여 통장들이 들어있었는데,그것은 모두 대기의 이름으로 되어있었다. 재산 분배를 하고 남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편지가 들어 있었는데 대기에게 정작 하고 싶은 말을 적어놓은 것이었다.
남자로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아들로서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아마 그 말이 대기에게 가장하고픈 말의 핵심같았다.

아마 그 말은 자신이 남자로써 이해하지못한 것을 아들인 너는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라는 말 같았다. 그것은 대기에게 어머니의 남자관계나 아버지와의 성적 트러블로 인식되었다. 어쩜 조금만의 마지막 남은 애정의 표현일지도 몰랐다.

그럴 수도 있다라고 언뜻 생각했다.정말 언뜻 한 순간엔 만약에 어머니의 외도나 또는 그 밖의 어떤 문제라도 아버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뜻 말이다.

갈사람은 가더라도 남은 사람들의 몫이 있는데 그것은 대기와 그의 누이들인 준혜와 상미의 거처였다. 준혜야 지금 청주에서 대학에 다니느라 어차피 자취를 하고 있었으므로 대학을 졸업할 때 까지는 현재대로 생활해야 할 것이고 생활비만 조달해주면 될 것이다. 대기도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문제될껏은 없었으나,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상미가 문제였다.

여러 각론 끝에 대기와 같이 서울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기로 하고 아파트를 한 채 구입하기로 했다.

분주하게 아파트를 구하고 짐을 옮기고를 마치고 대기에게 한 숨의 여유가 생길 무렵에 대기는가슴에 스멀거리던 의문을 풀기로했다.

- 한 실장에게 들었읍니다.일을 아주 잘하신다고…여기 이 사람입니다.조용히 부탁합니다.

- 아 예,그냥 뒷 조사만 하면 되죠?

-예,그리고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한 실장에게도요.

-알았읍니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 사내에게 대기가 부탁한 것은 어머니인 허영심의 뒷조사였다.
어머니의 뒤를 캔다는 것이 꺼림칙하고 곤혹스러운 것이었지만,자식으로서 그래서는 안된다는 이성이 강하게 작용했지만 대기에겐 알고싶다는 욕구가 더욱 강했다.

지식들을 팽개치듯 버리고 떠나야했던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싶었다.그것은 아버지와 이혼한 것은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어째서 훌쩍 떠나버렸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처음에 아버지와의 이혼을 들었을 때부터,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기 까지의 시간 동안 대기의 어머니인 허영심은 자녀들과 같이 살겠다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않았었다.물론 아버지와 미리 결론을 내린 상태였겠지만 대기의 생각엔 서운하리만큼 그런 말을 하지않았다.

대부분의 모정이란 것이 남자와 헤어질 때 자식들과의 관계에 더 연연할 것이라는 대기의 믿음을 송두리 허물어 버릴 정도로 그녀는 일언반구의 기색도 내지않았다.

왜일까?
자식들이 그만큼 부담스러운 존재였던가? 그 정도의 애착도 없었던 것일까?
짐짓 거짓으로라도 눈믈을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대기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남편하고는 이혼하더라도 자식들과는 같이 살고 싶다는 말을 하지않은 어머니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버지 말대로 남자로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자식으로서는 이해하리라던 말도 여기엔 적용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식이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어찌하랴.

아마 남자 문제일 것이다
대기는 나름대로 결론을 이미 내리고 있었다.
힘없이 떠나가던 아버지의 모습이 품어내는 연기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고개를 떨구고 양어깨가 무거워 보이던 아버지의 뒷모습. 이제 사십 칠세의 나이답지않은 모습이었다.그것은 육십, 아니 칠십은 되어보이던 모습이었다.

그래 틀림없어,아버지는 남자였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던 그것,그것은 다른 남자가 생긴 어머니였던 거야.
따르던 술 잔에 어머니의 웃는 얼굴이 어른 거렸다.밝은 표정의 여자 모습,그러나 그 모습이 대기에겐 남자를 홀리는 요부의 모습으로 투영되는 것이었다.
아니지…후후 그래도 나에겐 어머니인걸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술 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어마,오늘 우리 조이사님 너무 마신다.안좋은 일 있으세요.혼자서 양주를 두 병씩이나 드시게

둥지의 마담겸 주인인 이영숙이 옆에 앉으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특유의 코맹맹이 소리다.

-죽기야 하겠어..여기 술 한 병 더 가져와

-어마 이젠 그만 드세요.많이 취했어요.

-가져오라면 가져오지 왠 말이 그리많아요. 나 그럼 다른데 가서 마신다.

-가긴 어딜가요.마실려면 여기서 마셔야지..자자 자리에 앉으셔요.얘 김양아 여기 술좀 가져와라. 오늘 조이사님 와일드하고 멋지다.

벌떡 일어서는 대기의 팔을 잡아 앉히며 이영순이 바짝 붙어앉았다. 여전히 팔을 감은 상태라 팔꿈치엔 물컹한 살이 느껴진다. 아마 그녀의 가슴살이리라.

-흐 와일드하고 멋지다? 그럼 이영순이 나하고 연애 한 번 할까?

-연애? 어머 조이사님이 그런 말도 다할줄 알아요? 샌님 인줄 알았더니..좋아요,저야 이사님이 하자면 언제라도 오케이

-그럼 송만석이,부회장은 어떡하고?

-어마 말씀하시거 봐,제가 뭐 부회장님 마누라도 아니고,연애하자면서 그런 말은 뭐하러해요?

-싫다,싫어 여자들이 싫다.이영순이도 싫고 다 싫어

-어마 언제는 나하고 연애하자더니,취하긴 취하셨네 우리 이사님.

-언니는 왜 이사님 옆에 계세요? 제가 옆 자린데..호호호 언니한테 이사님 빼앗겼네,내가 찜했는데

김양이라는 여자가 술을 내려놓으며 짐짓 농을 해댄다.잠깐 잠깐 대기 옆에서 술을 따르던 아가씨다.

그 때 대기의 술좌석 앞으로 한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허영순. 대기의 이모였다.

-어 왔니? 조이사님이 너무 취한거 같다.네가 걱정하는거 같아서 연락을 하긴 했는데

-아니 괜찮아,그리고 고마워. 안녕하셨어요 이사님?

-어라 이게 누구야?

상황을 지켜보던 김양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간다. 그래도 허영순은 그대로 서있다. 상당히 취해서 고개를 떨구고 있던 대기가 고개를 들어 허영순을 바라보곤 다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허영순을 바라본다.그리고는 그제야 허영순이 왔음을 알아낸듯 고개를 옆으로 세차게 흔들며 정신을 추스린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앉으라고 권한다.

-아니 여긴 어떻게?

-예 제가 연락했어요.전에 이사님 소식을 몰라 궁금해 하길래

주인인 이영순이 대신 대답한다.

-죄송해요,근 한 달이나 소식이 없어서…회사에 몇 번인가 전화를 드렸는데…그래도 연락이 없으시길래…제가 영순이한테 혹시 여기 오시면 연락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아하? 아..음 그래요..연락을 했다?..음 그나 저나 왔음 한 잔 하셔야지 자 여기 이 잔 받으세요

-그럼 두 분들 이야기 나누셔요

대기가 허영순에게 술을 권하자 주인 이영순이 자리를 비켜준다.

-저어 이사님 많이 취하신거 같은데..괜찮으세요?

-아하 내 걱정은 붙들어 매시고 쭈욱 한 잔 하세요.그리고 나도 한 잔 따라주고

거슴츠레한 눈 빛으로 허영순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그리고 자신에게 술을 따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대기의 눈에 어머니인 허영심의 모습이 비쳤다. 앞에 앉아있는 여자 허영순은 대기의 어머니인 허영심을 많이 닮았다. 전에는 살이 좀 많아서 비슷한 정도가 덜했는데 오늘의 모습은 어머니의 모습을 많이 닮아있었다.대기가 술에 취해서가 아니라 근 한 달 사이에 체중을 상당히 줄인
허영순의 모습은 언니인 허영심의 얼굴과 너무도 흡사했다.

-어라?…아니 여기엔 ..아니지 아니지

대기가 다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앞의 여자를 다시 보았다.

-네? 이사님 괜찮으세요?

거기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대기의 이모가 앉아있다.대기가 보았던 어머니는 없었다.

-그 그렇지..여긴 서울이지…흐흐 간 사람이 여기에 있을리 없지..

-저어 이사님 오늘은 그만 드시고 가셔요.너무 취하신거 같아요.

영순이 걱정하며 대기의 옆으로 오더니 그의 팔을 잡으며 일으켜 세우려한다.

-흐음..그래 난 취했어..취했지,내가 취하지 않으면 어떻게…그래..

-자아 저한테 기대고 일어나셔요.

-..음..그래서 일어나서 어디로 가지?…후후후 어디로 갈거냐고요

-..예?…그 글쎄..그건 이사님 댁으로…안들어 가실거예요?

-후후후 거길 뭐하러…아..그렇지 내 집으로..아니 아니 거기 말고 허사장 집으로 가서 한 잔 더 할거면 내 일어나고..아님 여기서 계속 마시던지…나 그정도로 취한건 아니고요…내가 마실 일이…어떡할거요..나쁜 사람…당신은 나쁜 사람이야..그러니까 내말은 한 잔 더하자 이거요

-그러시면 차라리 집에가서 한 잔 더하셔요…그러니 이제 일어나셔서…조심하셔요

택시를 타고 허영순의 아파트에 도착할 때까지 삼십여분 동안에도 대기는 횡설수설하였다.그런 대기의 주정을 전혀 싫은표정없이 허영순은 들어준다.

허영순이 사는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먹은 것을 토해낸 대기는 영순이 타준 꿀물을 마시고 나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온듯 하다.

-여기가 어디죠?

-예? 아 예 여긴 제가 사는 아파트인데 기억 안나셔요?

-아,그랬지..아파트..근데 왜 여기로 왔죠?..아 맞다 그랬지..이거 죄송합니다.내가 좀 많이 취해서

-이젠 좀 괜찮으세요? 속은 어때요? 뭐 좀 약이라도 드실래요?

-아니..됐어요.이젠 괜찮아요..차라리 시원한 음료수나 한 잔,아니 아니다,그거말고 시원한 맥주나 있으면

-저어 취하셨는데 또 술을 드시면

-뭐 맥주가 술인가요.속풀이를 하려면…저는 맥주로 뒤풀이 하는 스타일이라서..없어요?

-아..아뇨 있긴한데..

마지못해 영순이 냉장고에서 맥주를 가져오고 술 잔에 따른다.
그리고는 안방으로 들어가서는 옷을 가져왔다. 남자 잠옷이다.

-저 맞을지 모르겠네요,이 옷으로 갈아입으셔요.혹시 몰라서 준비해논건데…사실은 오시면 드릴려고..저희 가게에서 파는건데…

얼굴을 붉히며 옷가지를 놓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이걸 입어야하나 말아야하나를 놓고 잠시 망설이던 대기는 옷을 갈아 입기로했다.그것은 여기서 자고 간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망설이다 막 바지를 입고 상의를 입으려고 런닝셔츠를 벗는데 영순이 방에서 나오다 멈춰섰기 때문에 빠른동작으로 잠옷을 걸쳤다.

후훗 뭐 내가 당황할 필요는 없는데.
그런데 저 여자..이모는 나를 이 곳에서 재우려는 의도가…? 하긴 뭐 이미 할건 다 해버린 사이인데…그렇다고 하더라도…이런 잠 옷까지 준비를 해논 것은 왠지…그래…오늘 일만은 아니지..
..하긴…그래도 어머니도 그랬을까? 어머니도 다른 남자에게 이렇게..아버지가 아닌..내가 뭘 생각하는거지? 어떡할까..내가 오늘 이모를 원하면..? 아니지..아니지..그래 아니야..그건 한 번으로 족해..아니 그건 해서는 안되는..절대로 절대…후우 내가 여자에 목마른 발정난 개도 아닌데…그런데 이모는 왜 저런 옷을 ..저건 남자를 유혹하려는…그럴리가 없어..그래... 평소에 집에서 입던...옷이니까 생각없이 그런거야…그래도 이건 너무 야해…속이 훤히 보이는..이건 너무 짧아 허벅지가 다 드러난..아냐..그럴리가 이 여자..이모는 그저 불쌍한..이혼녀..그래 남자에게 이용당한...
불쌍하고..가련한..의지할데 없는..그래서 나에게 의지하는..그래,그래..그럴꺼야..
어머니도 그랬을까…? 다른 남자 앞에서 이런 옷차림으로..그리고 저렇게 미소지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다른 남자의 잠 옷을 준비하고..휴우

검정색의 잠옷으로 갈아입고 대기의 맞은 편 쇼파에 앉아 있는 영순을 보며 대기는 여러가지 사념에 정신이 없다. 그런데 자꾸만 영순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의 모습과 비교를 하게되는 자신에게 스스로 깜짝 놀라 술을 연신 들이킨다.

-천천히 드셔요,체하시겠어요

-아,한잔 드세요.참 시연이는요?

-지금 자요.시간이 벌써 열 두시가 넘었는걸요.근데 안좋은 일이라도..?

-그렇게 보여요? 후후 안좋은 일이라..그렇지 무척 안좋은 일이지..참 근데 허사장님 한테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

-어떤..걸요..?

-음..그러니까 뭐 이건 개인적인 건데…대답 안해도 되는건데…?

-무엇인데요?

-누굴 정말로 좋아해 본적 있으세요?

-…?

-아 그러니까 여자로써 어떤 남자를 정말로 좋아해본적이 있느냐 이런 말이죠.

-…예

-그럼 그 남자 때문이라면 시연이…그러니까 자식과는 멀어져도..일테면 다른 가족을 다 팽개치고 둘이서만 어디론가 떠나버릴 수도 있나요?

-..에..그 글쎄요..전 도무지 무슨 말씀이신지…죄송해요.

-하하하 뭐 죄송할건 없고요..난 그저 여자의 심정..그러니까 자신이 낳은 자식들이 먼저냐, 아님 사랑이 우선이냐 하는…역시 말도 안되는 ..그렇죠?

-이사님 오늘 무슨 일이 있으신거 같은데…죄송해요 제가 힘이 돼드리지 못해서.

-왜 힘이 되는 일이라면 할래요?

-…저야 당연히 이사님이 원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해서..은혜를 갚을 수만 있다면…이사님은 저나 시연이 한테는 은인이신데…말씀만 하여주시면.

-호, 어떤 일이라도..?

-..예…어떤 일이라도요

-뭐 그럴 일이 있겠어요…자 우리 술이나 한 잔 더하고 자야죠.밤도 늦었는데…자 건배 허사장님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아아 참 그리고 시연이의 행복한 앞 날을 위해

-고마워요 건배

몇 잔의 술을 마시고 대기는 잠자리에 들었다.싫다는 대기의 말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안방에서 자야한다는 영순의 청을 거절 할 수 없었기때문에 안방에 누웠다.영순의 손길이 느껴지는 아늑하고 정갈한 방이었다.

-후후 이모가 누웠던 자리. 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거지? 조대기 너라는 놈은 도대체…후후
어머니도 그랬을까? 내가 모르는 남자와 이렇게 같은 집에서…이모가 나한테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가게를 마련해주고 집을 장만주고,사채를 해결해준 사람…내가 왜 그랬다고 생각할까?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휴우
내가 같이 자자고한다면? 아니지 조대기 그럼 안되지..응할까? 저 번의 일도 있기때문에…아냐
그러면..어머니는 어머니이기 전에 여자였던 걸까?..내가 왜 이러지?

어떤 남자일까? 그 남자..도대체 어머닌 아버지를 두고…아버지는 어머니를 성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한걸까? 아님 다른 문제라도..그럼 어떤 문제…이모나 어머니는 어디가 닮고 어디가 다를까? 누가 더 색을 밝힐까?..이런 대체 왜 이런 생각을..?

대기가 잠을 못이루고 뒤척이며 잡다한 생각을 할 때 안방문이 열리며 영순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대기는 순간적으로 짐짓 잠이든 것처럼 눈을 감았다.
이윽고 대기의 옆에 서있는 영순이 느껴졌고 한참을 망설이며 서있는 것 같다.그러더니 살며시 옆에 앉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정적이 잠시 흘렀다.

왜일까? 이모는 이방에 왜 온것일까? 남자가 그리웠던 것일까? 사내의 체취가 중년의 이 이혼녀를 잠들 수 없게 하였던 것인가? 나는 어떡해야 하는 걸까? 이모는 지금 어떤 감정으로 내 곁에 앉아있는걸까?

-저어…주무세요….

-….

-죄송해요…제가 주제 넘은줄은 알지만…그렇지만…그래도…제가 필요하시면…그냥 단지 제 육체만이라도 좋아요…전 어떤 것을 요구하셔도…제가 욕심을 부리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요…전 ..죄송해요…흑흑흑…죄송해요

짧지만 분명 흐느끼는 소리를 대기는 들었다.이모는 울고 있는 것이다.

이모는 울고있다.왜지? 여자로서 남자의 침실에 온 것이…아 그래 지금 이 행위가 그녀에겐 참을 수 없는 슬픔…? 그런데 이건 뭐지? 몸으로 갚겠다는 것은…결국 이것은 창기…돈을 받고 몸을 파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지? 아니지 그렇다면 돈있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전부…설령 그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동반한다 하여도 결국 돈이라는 것이 촉매제나 어떤 연결 고리를 형성했면…뭐 이리 복잡하냐?

난 어떻게 해야지? 지금 난 어떻게해야지?

대기의 갈등, 그러나 그의 행위가 마음속의 갈등을 앞질러버렸다.
대기는 여러가지의 생각이 그의 행동을 제지했음에도,잡다한 이성이 그의 몸을 통제하려고 시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가 먼저행하였다. 감성이 먼저 움직이고야 말았다.
대기는 눈을 떴고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켰다.그리고 자신의 옆에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삼십 중반의 이혼녀의 두 눈을 자신의 두 눈과 마주쳤고 두 팔을 뻗어 울고있는 여자의 어깨를 안고 그 떨림을 공유했다.

그리고 어깨를 가늘게 떨고있던 여자의 입에서 조그만 소리를 들었다.그 소리는 매우 작고 떨림이 심했지만 분명한 어조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사랑..해요…전 당신을…사랑..해..요..그렇게 되어…버렸어…요..죄송해요…사랑해요…저는..
…당신을 진심으로…어쩔 수가…저는…어쩔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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